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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월간금융계
  • 기획
  • 입력 2012.04.04 16:09

수협, 50주년 맞아...

 

 

창립 50주년을 맞는 수협이 미래 100년을 기약하는 힘찬 도약을 다짐했다.

수협중앙회는 4월 2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잠실 롯데호텔 3층 크리스탈볼룸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갖고 대한민국 최고의 협동조합으로 거듭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장관, 이종구 수협중앙회장을 비롯 수산단체와 수산인, 어업인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수협은 창립 기념일이 4월 1일 일요일인 점을 감안 기념행사를 하루 늦쳤다.

이날 창립 기념식에서 수협은 50주년을 맞아 2021년까지 󰡐하나의 가치, 하나된 힘, 최고의 협동조합󰡑을 새 비전으로 설정하고 바다 너머 미래 100년을 향해 세계로 뻗어가는 최고의 협동조합으로 만들어 가자고 강조했다.

수협 비전 2021은 수산인에게 풍요로움을, 고객에게는 신뢰감을, 임직원에게는 자긍심을 주는 수산업의 중심체로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협동조합이 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수협중앙회 본사건물
이를 위해 수협은 수산인의 소득증대 등 경제적 자립을 위한 유통․금융 서비스를 강화하고 어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생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며 능력 중시․성과 중심의 조직문화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이날 기념식에서는 어업인 소득증대와 복지어촌 건설, 수협발전에 공이 많은 어촌 지도자를 발굴․시상하는 유공자 포상에는 사천수협 강규봉 조합장이 동탑산업훈장을, 경주수협 하원 조합장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산업포장에는 임동홍 수협중앙회 상임이사와 한림수협 홍경자 어촌계장, 통조림가공수협 방관혁 상임이사가, 대통령 표창은 수협중앙회 이길동 부장과 해남군수협 조합원 박병찬씨, 구룡포수협 대의원 김헌길씨가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종구 수협중앙회장은 창립 50주년 기념사를 통해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하던 50년 전 수산강국의 꿈을 안고 첫발을 내딛어 그동안 국가경제와 근대화를 뒷받침하는 큰 역할을 해왔다󰡓며 󰡒향후 50년은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성과가 번영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기울여 100년의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해 나아 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수협은 이와함께 창립 50주년을 맞아 국민과 소통하는 다양한 행사도 펼쳐 나간다.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특산 수산물대축제󰡑를 수협 청사 일원에서 펼쳤다. 4월 4일부터 4월 9일까지는 󰡐어촌사랑 바다사랑 사진전󰡑을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한다.

이 뿐만 아니라 󰡐어업인 수기 공모전󰡑이 오는 4월 30일까지 공모․접수를 받고 󰡐어촌사랑 초등학생 글․그림 공모전󰡑이 하반기에 있을 예정이다. 또, 특별히 국민을 대상으로 󰡐자전거 국토 해안 대장정󰡑도 계획돼 있다. 국민들로 하여금 국토의 중요성을 알리고 수협의 역사성과 바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객과의 소통을 위해 펼치는 󰡐사랑海썸머페스티벌󰡑이 여름 휴가 시즌에 개최되며 어업인과 함께하는 방송도 추진 중이다.

이와 함께 수협은 수산업과 수협의 위상제고를 위해 󰡐수산어촌대토론회󰡑와 󰡐전국 수산인 전진대회󰡑도 예정하고 있다.

수협의 발자취…

 어촌경제 근대화 위해 탄생

1962년 현판식
현재의 수협은 1962년 1월 20일 어촌의 현안을 해결하고 식량 자급 등 어촌경제의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수산업협동조합법을 제정하고, 4월 1일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를 설립했다.

이 때의 수협법으로 종래의 수산단체에 대한 재편성이 단행됐는데 당시에 난립해 있던 152개 어업조합(지금의 지구별 수협에 해당) 중 66개 조합이 통폐합되어 86개 지구별 어업협동조합으로 정리가 이루어졌다. 또 6개의 어업조합연합회를 해산시켜 그 권리와 의무 일체를 수협중앙회가 인수하게 됐다.

그리고 20개의 수산조합(지금의 업종별 수협 및 수산물가공수협에 해당)중 부실한 7개 조합을 해산시키고 13개 조합만을 존속시켜 총 99개 조합(1962년말에는 102개 조합)으로 수협중앙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전국의 어업인들은 조합원으로 참여하며 계통조직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업인 권익보호를 위한 위대한 첫 날개짓(1960년대)

수협이 발족된 1960년대에는 자체조직과 사업기반 구축, 낙후된 어촌사회의 개발과 어업생산구조 개선을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발족 당시 수협은 86개의 지구별 조합과 11개의 업종별조합, 2개 제조업조합 등 총 99개의 회원조합과 중앙회로 구성됐는데 수협은 당시 어촌에 산재해 있던 각종 계 조직을 수협의 계통조직으로 흡수하며 어촌계를 조직해 이러한 활동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업무적인 면에서도 1963년5월1일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로부터 수산관련 자금을 인수해 여신업무를 개시했고 문화사업을 통한 어업인 일체감 조성을 위해 그 해 11월에는 현재의 ‘수협의 노래’(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를 제작하기도 했다.

1965년 4월16일에는 수산정책자금 일원화 조치에 따라 수협중앙회에서 수산자금을 취급할 수 있게 됐으며 5월 들어서는 어업용 유류 직배사업업무를 개시하며 대 어업인 지원을 위한 제반 여건을 충실하게 마련했다.

이 당시에는 수협이 전국의 어촌을 돌며 어촌현장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수협이 직접 어업지도선(67.8.18, 이화호)과 유조선(67.9.27,제1수협호)을 건조해 생산력 증강을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수산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12월31일 어업용 유류에 대한 면세조치가 취해졌으며 다음해 1월에는 수산용 기초부품에 대한 관세 면제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어업인에 대한 국가차원의 사기진작에도 아낌이 없었는데 1968년11월30일 4월1일을 ‘어민의 날’로 제정·공포하기도 했다. 이후 어업인들은 독자적인 기념일을 가지지 못하다가 수협 창립 50주년을 맞는 2012년 4월1일, 38년만에 ‘어업인의 날’이 부활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1960년대는 한·일협정으로 인한 대일 청구권자금이 수산업부문에 투입되면서 각종 사업이 활기를 띈 시기로 기록할 수 있다. 그 결과 각종 어업시설을 확보한 것은 물론 어선이 대형화되면서 이후 이뤄지게 될 수산업의 성장기틀을 다진 시기라 할 수 있다.

수협도 1960년대 말부터 수산금융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완비해 5개년 계획을 통해 1백억원 자체자금조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수협, 거침없는 성장의 날개를 달다(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내방

수협이 태동했던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국민경제는 경제개발 계획의 성과로 연평균 8%의 경이적인 성장률을 나타냈다. 그러나 수산업 부문만 떼어보면 오히려 국민경제보다 높은 연평균 11.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눈부신 경제성장과 함께 1970년대 초에 일어난 새마을운동은 수협운동과 동질성을 이루며 더 큰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수협은 당시 2,000여개에 이르는 어촌계 조직력과 어촌계원의 협동을 바탕으로 어촌 새마을 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해 어업인소득증대는 물론 어촌환경 개선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수협중앙회 조직도 이 시기에 장족을 발전을 거듭해 인력면에서는 1962년 141명으로 출발해 1972년에 909명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 사업규모도 1962년에 18억원에서 614억원으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초창기 협동운동과정에서 일어난 시행착오와 모순등을 과감히 시정해 보다 효율적인 조직으로의 정비를 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26개까지 늘어났던 회원조합을 부실한 조합과 행정구역 또는 경제권 중심으로 개편을 단행하여 88개의 조합으로 축소했다.(1973년)

그러나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던 수산업도 1973년부터 몰아닥친 세계적인 유류파동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 시기 수협은 운영목표를 수산업 발전에서 어업경영안정으로 전환하고 영어자금과 각종 어업생산자재의 원활한 공급, 생산어업인의 소득증대를 위한 수산물가격 지지사업 및 무역사업 등을 전개했다. 또 전국 주요소비도시에 내륙지 공판장을 설치하여 유통비용이 과다하게 소요되는 비효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 나갔다. 1979년부터 2년동안 기존의 서울, 대구에 이어 광주, 진주, 춘천, 대전, 청주, 전주 등에 공판장을 개설 운영하며 석유파동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해 나갔다.

한편 이 시기 수산물은 국가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는데 1978년7월27일 중앙회 수출 실적 1천만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그 해 12월에는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는 산업화의 기반이 미미했던 시절 수산업이 근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헌과 기여를 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협은 이 시기에 국제적인 협동조합운동에 동참했는데 1979년3월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ICA(국제협동조합연맹)집행위원회에 참석해 회원가입 승인을 얻어 만장일치로 정회원에 가입하며 세계적으로도 협동조합운동의 반열에 함께했다.

 

성장을 넘어 도약의 시대로(1980년대)

제1회 정기총회

성년기를 맞게 된 수협은 어업인의 소득증대와 복지향상을 위한 각종 사업을 강력히 추진해 어업인의 생활전반 및 어업경영을 지원하는 종합 협동조직체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 시기 수협은 전산화 도입으로 업무처리에 혁신을 맞은 시기였다. 1981년 서울지역 고객 자동이체 업무가 개시된 것을 시작으로 다음 해에는 중앙회 국고대리점 업무도 시작했다. 이후 통신의 발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1985년에 예금 온라인 업무, 양도성 예금증서 업무, 1988년에 신탁업무를 개시했다.

한편 이 시기 수산물 수출은 지속적으로 호조를 보여 83년에는 제20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수출탑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수출 4천만달러를 돌파해 산업화의 효자노릇도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1980년대의 경제정책 기조는 소비자보호 우선의 물가안정, 민간주도의 경제성장으로 전환됨에 따라 수협의 경영여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수협은 제2차 수협발전5개년계획을 세우고 이를 차근차근 실천해 나갔다. 이 기간중 매년 안정적인 흑자를 시현해 나갔고 1981년을 기준으로 1986년에 사업규모 2배, 자산규모 2.4배, 자본금 3.7배, 수익규모 3.4배의 내실있는 성장을 이룩했다.

 

수협 민주화 정착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협동조합에 있어서도 민주화 차원의 법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수협 발족당시 수협의 조합장 선출은 총회에서 이를 직접 선출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에 따라 ‘선거 과열 및 그로 야기되는 부조리를 사전에 막는다’는 명목하에 임명제로 전환되었다. 그러다 6월 항쟁 이후 1988년 12월 수협법 개정을 통해 임명제 수협 조합장제도가 사라지고 조합원이 자신들의 조합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변경되면서 수협조직의 민주화와 경영의 자율성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이에 1990년 4월19일 수협에서도 민선 조합장의 손으로 첫 민선회장을 선출해 민주화를 완성하게 된다.

 

수협 중흥기를 맞다(1990년대)

민주화와 자율화의 숙원을 해결한 수협은 자립경영 기반 확립을 위해 1990년 ‘수협대약진’운동을 시작하고 12월4일에 ‘3조원 자체자금 조성운동’추진결의대회를 열어 당초 계획보다 1년 앞선 1992년 목표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또 다시 2단계 수협대약진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부 조직과 사업 전부문에 걸쳐 양적·질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 수협은 경운동 청사시대를 마감하고 현재의 잠실청사로 이전하게 되는데 때를 맞추어 수협방송을 개국해 어업인을 위한 교육과 정보전달의 역할도 강화했다. 1998년에는 천안 연수원을 준공해 수협 교육사업의 요람으로 자리잡게 돼 지금까지 매년 회원조합과 중앙회 임직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통한 어촌과 수산업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어업인을 위한 인프라 뿐만 아니라 영어자금 공급에 있어서도 1995년부터 매년 1천억원이 증가하여 1998년에는 수협사상 처음으로 1조원이 넘는 규모의 자금을 공급했다. 1998년에는 상호금융 예금자보호제도도 시작해 수협 상호금융을 이용하는 고객들이 안심하고 예금을 들 수 있는 제도도 만들어 어업인 뿐만 아니라 고객과 함께하는 수협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공적자금 지원 등으로 협동조합 위축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수협에도 일대 변혁을 겪게 된다. 문민정부는 규제철폐를 내세우며 개혁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수산업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그 동안 의무적으로 수협 위판장을 이용하던 제도(강제상장제)를 1997년 7월1일 자유판매제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협동조합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경제사업의 근간을 흔드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수협 경영의 위기를 불러와 1999년 9월7일 9개 도지회를 폐지하는 등 조직의 축소를 불러왔다. 이후 2000년 독립사업부제를 골자로 하는 수협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급기야 2001년4월26일 예금보험공사와 MOU를 체결하며 공적자금을 지원받기에 이른다.

 

시련을 기회로 승화(2000년대)

공적자금 투입으로 수협은 큰 시련을 겪게 되지만 변화와 변혁, 개혁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간다.

우선 2001년 ‘뉴스타트180운동’을 시작으로 매년 경영혁신운동을 전개하며 경영성과를 쌓아나갔고 조직의 역량을 경영정상화를 위해 쏟았다.

특히 경제사업 활성화를 위하여 노량진수산시장을 인수하는 쾌거를 이룬다. 노량진수산시장은 1988년부터 인수를 추진하여 많은 난관 끝에 2001년10월23일 인수에 성공해 지금까지 도심속의 싱싱한 수산물 공급과 휴식처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순항을 이어가던 수협은 2004년 ‘수산의 푸른미래 창조’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도약을 약속한다.

이 가운데 도시와 어촌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2005년부터 기업 및 단체와 어촌계의 자매결연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1,117건의 자매결연이 체결돼 있는 상태다. 어업인 복지증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2009년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을 설립해 어촌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수협의 위상은 한층 강화되었다. 2009년11월 수협은 ICA수산위원회 위원장국이 되면서 국내 수산업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산업 공동발전을 위한 중심에 섰다. 수산 인프라가 미약한 국가에 수산기자재와 정보화기기 등을 지원하며 함께 발전하는 수협의 모습을 세계에 떨쳐 2011년에는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아 협동조합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ICA 의 ‘로치데일 파이오니아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대어업인 지원 사업은 한층 탄력을 받아 그 동안 위성방송으로 어업인에게 제공하던 정보의 질을 높이고 더욱 다양한 시청층을 확보하기 위해 2010년 어황방송을 개국, 수산정보와 해황정보 등을 적기에 제공해 어업인들이 양질의 정보를 통해 생산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정보환경도 제공했다. 또 2009년에는 소식지 ‘어업in수산’을 발간해 어업인들의 정보비대칭성을 완화하는데도 노력해 오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가는 출발점(2010년대)

2010년대 들어 수협은 그 발전을 더욱 가속화한다. 규모 뿐만 아니라 성장의 질에 관심을 기울여 어업인과 함께 동반성장하는 기반 구축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특히 어업인 지원에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2010년 10월13일 10년 가까이 분리돼 운영되던 지도와 경제사업을 통합한 것은 물론 현장 어업인의 목소리를 더 가까인 듣기 위해 2011년 2월 경남지역사업본부를 개소하기도 했다.

또 지속가능한 수산업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 세계 석학들의 의견을 듣고 전세계적인 중지를 모아가기 위해 ICA수산위원회와 공동으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2010년 심포지엄에서는 ‘세계 수협의 날’을 제정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서울선언을 채택, 그 해 9월 ICA수산위원회에서 서울선언이 채택됐던 6월16일을 세계수협의 날로 제정했다. 이에 따라 2011년 ‘제1회 세계 수협의날’ 기념식을 서울에서 개최했다.

또 국내최대의 수산물가공처리공장인 인천가공물류센터를 2011년 준공해 수산물 안전성 확보를 더욱 강화했다.

2012년 창립 50주년을 맞는 수협은 ‘하나의 가치, 하나된 힘, 최고의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향후 10년의 발전전략을 함께 제시했다.

이 전략들을 성실히 실천해 가면서 자기혁신과 변혁을 통해 효율성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최고의 협동조직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했다.

아울러 21세기 신 해양시대에 수산업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어업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국민경제에도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본연의 임무와 기능을 더욱 충실히 수행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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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res 2016-05-25 13: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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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ddo_man 2016-05-25 01: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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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lowe 2016-05-25 00: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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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ilbar 2016-04-21 15: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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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leigh 2016-04-21 15: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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