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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월간금융계
  • 칼럼
  • 입력 2012.07.05 15:20

은행과 뱅크

[월간 금융계]

'불세출의 영웅'이란 무슨 뜻일까, '주식'은 어디서 온 말일까, '회심의 미소'란 어떤 미소일까…. 본지에서는 은행에서 35년간을 근무하면서 옥편과 국어사전을 항상 곁에 두고 단어의 어원들에 대한 재미에 푹 빠져 ‘어느 샐러리맨의 낱말산책’이라는 책 까지 펴낸 산업은행 이경엽실장의 재미난 글을 매월 연재합니다.

특히 필자는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 덕분에, 한자의 어원과 유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낱말들이지만 필자가 연구하고 조사해 풀어낸 말의 정확한 쓰임과 어원을 보면 머릿속의 지식을 관장하는 뇌의 크기가 순간적으로 커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한자말들의 상당수는 일본말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매월 독자들과 단어들에 대한 이해와 단어들이 주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일본 게이오대학 성학 석사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1977년 한국산업은행
도쿄지점 과장/방카슈랑스사업단장
구미지점장
몇 해 전 여름휴가로 대마도에 간 적이 있는데, ‘십팔은행(十八銀行)’이란 이름의 은행 간판을 본 기억이 있다. 예전 도쿄에서도 숫자로 된 은행 이름을 본 적이 있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새삼스러운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에는 이처럼 숫자로 된 이름의 지방은행들이 몇 개 있다. 十六은행, 七十七은행, 百五은행, 百十四은행 등. 이들은 모두 예전 국립은행 시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은 1872년 미국의 내셔널뱅크(National Bank) 제도를 도입하여 ‘국립은행조례’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조례에 따라 1873년부터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을 시작으로 ‘제백오십삼국립은행(第百五十三國立銀行)’까지 일련번호를 붙인 153개의 은행을 설립했다. ‘은행’이란 말도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의 ‘국립은행’은 국립은행조례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란 뜻으로, 국영은행이 아닌 민간은행이었다.

‘十六은행’과 ‘十八은행’의 원래 이름은 ‘제十六국립은행’, ‘제十八국립은행’이었는데, 나중에 주식회사의 형태를 띠면서, ‘제’와 ‘국립’이란 글자를 떼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가노현에 본사를 두고 있는 ‘팔십이은행(八十二은행)’의 유래다. 八十二은행은 처음에는 ‘제六十三국립은행’으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주식회사六十三은행’으로 바뀐 후, ‘제十九국립은행’을 흡수합병하면서 두 은행의 이름을 합친 숫자를 합병 후 은행의 명칭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은행(銀行)’ 간판이 처음 걸린 것은 1878년 일본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된 때다. 그리고 1896년에 우리나라의 근대적 은행으로 처음 설립된 조선은행(1901년 폐점. 현재의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과는 다른 은행)이후의 모든 은행들이 지금까지 ‘은행’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은행’은 영어 ‘뱅크(bank)’를 중국에서 번역한 말이다. 은(銀) 곧 돈을 취급하는 회사(行)란 뜻이다. 돈을 가리키는 말을 金이라 하지 않고 銀으로 한 것은 이 말이 번역될 당시 중국의 화폐제도가 은본위제였기 때문이다. 또 行은 가게를 뜻하는 글자인데, 양행(洋行)은 중국에서 외국인 상점 곧, 서양식 상점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 ‘유한양행(柳韓洋行)’이란 제약회사가 있는데, 필시 이 용례대로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行은 예전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각 도시에서 번창했던 동업상점을 뜻하였다. 예를 들면 육행(肉行․푸주간), 약행(藥行․약방), 금은행(金銀行․금은방) 등이 있었다.

일본이 ‘뱅크(bank)’를 번역할 때에도 ‘금행(金行)’ ‘금포(金舖)’ ‘금사(金司)’ 등등 논의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銀行으로 정해진 이유는, 중국에서도 이미 ‘은행’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었고, 또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은이 공통의 가치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金行(kinkou)보다 銀行(ginkou)이 발음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한자 行에는 두 가지의 발음이 있다. ‘가다’ ‘행하다’고 할 때에는 ‘행’으로, ‘늘어서다’ ‘순서’ ‘가게’ 등을 뜻할 때에는 ‘항’으로 읽힌다. 예를 들면 ‘行列’은 ‘행렬’과 ‘항렬’의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행렬’로 읽으면 여럿이 줄을 지어 가는 것, 또는 그 줄을 말한다. 그러나 ‘항렬’로 읽으면, 혈족의 방계에 대한 ‘대수(代數) 관계’를 나타낸다. 銀行의 경우 ‘行’은 가게를 뜻하므로 ‘은행’이 아니라 ‘은항’으로 읽는 것이 옳지만, 처음부터 잘못 읽어 관행으로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영어 뱅크(bank)는 이탈리아어로 ‘책상’ 또는 ‘벤치’를 뜻하는 방코(banco)에서 유래하였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은행가들이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그들은 주로 광장 한쪽에 녹색 천을 덮은 긴 책상 앞에서 환전 등의 거래를 했다고 한다.

은행을 예전에는 금융기관이라 했는데, 요즘은 금융회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금융기관을, 은행·증권회사·보험회사 등 자금의 융통과 공급 및 그 중개를 하는 기관이라고 설명한다. 기관(機關)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설치된 조직을 가리키는데, 어쩐지 딱딱하고 권위적인 느낌이 든다. 금융은 그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공적인 분야라 할 수도 있지만, 한편 민간 영역의 역할도 크다. 금융기관이라 말하면 공적 기능이 강조되고, 금융회사라 하면 상업적 기능이 강조되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나라 은행들은 금융기관에서 금융회사로 옮겨가는 도중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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