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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장효남 기자
  • 칼럼
  • 입력 2021.09.06 14:50

[채수창컬럼] 무후(후손없는) 광복군 추모제를 맞아

채수창 무후광복군기념사업회 대표(전 경찰청 경무관)
채수창 무후광복군기념사업회 대표(전 경찰청 경무관)

[청년투데이=장효남 기자] 지난 8월15일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이 있었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1920년부터 101년만이고, 카자흐스탄에서 75세로 서거한지 78년 만이다.

가슴 뭉클함이 가득했으나 한편으로 같이 싸우다 희생된 독립군의 활약, 현황 등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어 아쉬움이 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항일무장투쟁은 장군들만 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독립군이 참여했으며, 무장투쟁 와중에 많은 독립군이 전사, 옥사, 자결하였다. 유해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가 부지기수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깃발 아래 모였고, 1942년에는 광복군을 비롯한 항일 유격대가 16,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 중 해방 이후 현재까지 144구의 유해가 봉환되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됨으로써 일제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1907년 조선군대가 강제로 해산됨으로써 해산된 군인들에 의해 의병 무장투쟁이 본격화 된다.

그러나 1910년 결국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난후 항일독립선열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하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이등박문 저격 사격이 발생하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남으로써 독립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르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군사력은 점점 강해져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항일독립선열들은 나라를 되찾으려면 교육 및 계몽운동 가지고는 부족하고 일제와 직접 전쟁을 하는 무장독립투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중국 또는 러시아군에 합류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무장독립운동은 중국 국민당과 함께하는 광복군 세력과 중국 공산당과 함께하는 조선의용대 세력, 러시아와 함께 하는 항일빨치산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당시 독자적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 및 러시아 세력과 힘을 합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은 미국과 공동으로 조선 침투 비행기 공습작전까지 세웠으나, 갑작스레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참전국이 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여 광복군은 한국군으로, 조선의용대 및 항일빨치산 부대는 북한인민군으로 참전하여 같은 항일독립선열끼리 총을 쏘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강북구 수유리 무후광복군 묘역에 묻히신 분들은 1943년부터 1945년 해방 당일까지 중국 산서성, 태행산 지구, 태원, 임현 등 대륙 각지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하던 광복군으로 일제와 싸우다 전사, 순국, 자결하신 17분의 유골을 모신 장소이다.

1967년 광복군 동지회에서 합동묘소를 조성하였고, 그 이후 각 시민단체에서 매년 묘역정화와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영웅의 시대가 아니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시대이다. 독립운동도 영웅만 내세우지 말고, 이름도 유해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독립군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때이다. 

글 무후광복군기념사업회 대표 채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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